영화 이야기

<소공녀>, 미소의 얼굴은 왜 사라졌을까?

별그물 2022. 6. 30. 02:11

 

<소공녀>ⓒ2017.광화문시네마.

 

<소공녀>(2017)가 여타의 청춘 영화와 비교해 굉장히 다른 점은 성장의 플롯이 없다는 점이다. 대개의 청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이라는 화두를 상기한다. 그것이 꼭 성숙이나 발전 같은 상승의 의미가 아니어도 말이다. ‘성장’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수반한다. 가령 한국 청춘 영화의 계보를 수놓는 작품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 <바보선언>(1983), 배창호의 <고래사냥>(1984)은 멜랑콜리한 시대에 조락에 가까운 청춘의 초상을 그리지만 그게 ‘성장’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청춘의 환상이 부서진 자리에 남겨진 생채기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할 것이다. 그들은 사건과 조우했고 알 수 없는 시간을 관통했으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환멸의 세계를 엿본 청춘들은 순수를 상실했지만 동시에 삶을 배운다.

하지만 <소공녀>의 미소는 성장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내면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다. 삶은 미소에게 계몽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미소가 대학 시절 밴드 동료들인 문영, 현정, 록이, 대용, 정미, 그리고 민지를 차례로 방문하는 여정은 어떤 삶의 비의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아니다. 비의와 깨달음을 주는 쪽은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소다. 미소는 친구들에게 계란 한판을 건네고(민지에게는 계란 한판을 주지 않고 닭백숙을 해준다.) 위로, 연민, 다독임을 넘치지 않게 표한다. 

 

 

20세기의 가장 저항적인 세대인 68세대(1968년 혁명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한 세대)의 정신은 1950년대의 비트세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1951)과 잭 케루악의『길 위에서』(1957)는 비트 세대를 상징하는 소설로 알려져 있다.『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10대 소년 콜필드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기성사회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극단적인 불평분자다. 이는 단지 세상이 부정적인 것 투성이라는 뜻이 아니다. 콜필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멋진 경험을 선사해줄 장소와 사람을 찾아 다닌다. 콜필드가 시종 세상에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은 현실이 그가 기대한 이상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콜필드는 세계를 부정하지만 그는 세계가 긍정의 장소로 도래하기를 희구한다. 그런 한, 콜필드에게 세계는 거대하고 알 수 없는 장소다.

 

 

『길 위에서』는 잭 케루악이 동료이자 우상인 닐 캐시디와 함께 미국과 멕시코 등지를 여행했던 경험을 다룬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들의 여행은 재즈와 마약, 성적 일탈이 이어지는 광란의 여정이었다. 하지만『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기성 사회에 대한 부정은 단지 아웃사이더의 극단적 일탈이나 중2병스런 허세가 아니었다. 그들의 행보에 20대 청년들이 가질법한 쾌락적이고 과격한 일면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감각적인 현란함에만 주목해서는 비트세대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들이 볼 때 기성의 사회는 감각적으로 경직돼 있고 정신적으로 왜소하며 물질에 경도돼 있었다. 그들은 감각적 금지선을 넘어 정신적 한계선 너머로 도약하려 했다. 비트세대는 길 위에서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봤다. 그들은 구도자처럼 미지의 세계를 궁구했다. 비트세대와 히피, 68세대는 기존의 세계를 부정한 크기 만큼 미지의 세계를 열망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세대들 이를테면 여피(young urban professional, 젊은 도시 전문직의 약자), 보보스(보헤미안과 부르주아의 합성어), 힙스터(원래는 1940년대의 재즈광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현재는 자시만의 독특한 취향과 코드를 가진 청년층을 일컫는 단어로 쓰임)는 더 이상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전 세대의 정치적인 진보성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그들이, 자본주의에 편승해 물질적 성공에만 천착하는 세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일차원적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라떼’ 담론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에 미지의 장소가 부재하다는 뜻과 같다. 1980년대부터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이들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미지의 장소를 탐구하기는 커녕 세상의 빠른 속도를 쫓아가기에도 벅찬 상황에 놓였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우 빠르게 도는 런닝 머신의 속도를 쫓아가지 않으면 금세 기구 밖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이 때 헬스장 창 너머로 보이는 여름밤 풍경을 여유있게 바라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미지의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걸 탐색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알 수 없이 거대한 장소가 아니라 쫓아갈 수 없이 빠른 장소가 되었다.

 

 

<소공녀>ⓒ2017.광화문시네마.


<소공녀>의 도입부에서, 미소는 가사도우미로서 친구 재경의 집안일을 도와주고 임금과 쌀을 얻어간다. 하지만 미소는 쌀을 담은 비닐에 구멍이 뚫린지도 모르고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흘러내린 쌀알이 거리에 남기는 자취는 미소가 도시를 횡단하는 느릿한 속도를 시각화한다. 그것은 도시가 요구하는 삶의 속도에 비해 지나치게 느리지만 덕분에 공원의 비둘기들은 맛있는 점심을 득템한다. 결말부에서 미소가 거쳐간 친구들, 문정, 현정, 대용, 록이, 정미는 미소의 방문을 회상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화면이 왼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서울 곳곳의 풍경들을 비춘다. 다리 위를 걷는 미소가 등장할 때 화면이 잠깐 느려지지만 이내 미소를 지나 다시 빠르게 왼쪽으로 지나간다. 마치 카메라가 미소를 발견하고 머뭇대다가 너무 바빠 다시 길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간만에 등장한 미소는 프레임에서 금세 사라진다. 결말부에서 미소는 그런 식으로 번번이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고 미소의 얼굴은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미소의 얼굴은 왜 사라졌을까? 

 

<소공녀>ⓒ2017.광화문시네마.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은 영화의 몽타주(에이젠슈타인은 통상적인 몽타주, 숏과 숏의 관계가 아닌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몽타주를 말한다.)에 있어 가장 “매혹적인 대립”은 “샷의 프레임과 피사체 사이의 대립”이라고 말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엮고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1, 39쪽) 피사체가 현실에서 존재하는 관성과 카메라의 프레이밍이 대립한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미소의 얼굴이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미소에게 멈추려는 카메라의 힘과 미소를 지나치려는 도시의 속도는 여기서 대립한다. 화면의 속도가 찰나 느려지는 것은 그 대립의 한 균형점이다. 하지만 삶의 속도, 도시의 속도는 미소에게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점심을 애원하는 비둘기들을 무심히 지나치듯 우리는 미소를 지나쳐야 한다.

 

갈곳이 없어, 텐트를 치고 한강변에 자리잡은 미소. 영화의 그 결말은 (그나마의)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그건 우리가 영화에 물어야 할 게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 것 아닐까? 미소를 지나치지 않을 수 있냐고, 한번쯤 멈춰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물어봐 줄 수 있냐고. 미소가 사람들에게 건넨 계란이 (영화 후반부 민지와 함께 먹었던) 닭(백숙)으로 자라는 작은 기적을, 그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