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민을 건축하다

안제이 바이다 <당통>, 인간이란 무엇인가

별그물 2021. 1. 19. 23:11

뷔히너  <당통의 죽음>, 에로세셸과 카미유가 말하는 '인간' 

우리 사회에서 ‘시민’이란 단어가 화두로 떠오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견지에서 사회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또 실천하는 시민 말이지요. 한때는 이런 저런 시민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사회의 어젠다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풀뿌리 민주주의 같은 말이 유행하며 시민의 역할과 소양을 강조하는 논의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시민’이라는 말이 무겁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시민’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라는 훈계는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또 ‘시민’의 소명에 대한 정치적, 이념적 견해들이 크게 갈리면서 무엇이 시민의 책임인지도 모호해졌습니다. 극심한 견해의 간극을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합니다. 광풍 같은 역사의 흐름에 몸을 싣고 앞으로 나가던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 역시 그러한 물음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독일 극작가인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의 작품 <당통의 죽음>에서, 당통과 뜻을 같이하며 국민공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에로세셸은 이렇게 말합니다.

 

“헌법 조문에 의무 대신 권리가, 덕목 대신 복지가, 처벌 대신 정당방위가 들어가야 해. 누구나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아야 하고, 자신의 본성을 관철할 수 있어야 해. 개인에게 분별력이 있든 없든, 교양이 있든 없든, 개인이 선하든 악하든, 국가와는 아무 관계없어...누구나 나름대로 인생을 즐길 수 있어야 해. 하지만 누구도 남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며 즐겨서는 안 되고, 남의 고유한 즐거움을 방해해서는 안 돼.” ( 게오르크 뷔히너, <보이체크/당통의 죽음>. 홍성광 옮김. 민음사. 2013. p.84.)

프랑스 혁명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은 아닙니다. 이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유럽의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계약된 것이라는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 노동자들이나 능력에 맞는 정당한 이윤을 원한 부르주아들은 새로운 사회계약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사회계약론’의 양극단에는 홉스와 루소가 있을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홉스는 인간이 악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군주제라는 사회계약에 도달했고, 루소는 인간이 선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시민이 직접 통치하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에 맞는 완벽한 정치체제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당통의 동료인 에로세셸은 개인이 선하든 악하든 국가가 그 특성을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그는 “누구도 남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며 즐겨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긴 합니다. 그러나 생사가 오가는 급박한 혁명의 와중에 그러한 관점이 다소 한가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이 선하든 악하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내버려두자는, 입장은 방임에 가까워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혁명에 있어 어떤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까요? 역시 당통의 친구이자 국민공회 대의원인 카미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국가 체제는 국민 몸에 딱 들어맞는 투명 옷 같아야해. 맥박이나 근육과 힘줄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야 해. 겉모습이 아름답거나 추한 건 문제되지 않아. 생긴 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더없이 사랑스러운 죄수인 프랑스의 어깨가 드러났다며 수녀 베일을 씌우려는 자들의 손가락을 잘라야 해. 우리는 벌거벗은 신들과 바쿠스의 무희들 그리고 올림포스의 유희를 원해. 그리고 ‘아 온몸을 녹이는 사랑이여!’라고 노래하는 입술을 원한다고...저 신적인 에피쿠로스와 엉덩이가 아름다운 베누스가 성자 마라와 샬리에 대신에 공화국의 수문장이 되어야 해.” ( 게오르크 뷔히너, <보이체크/당통의 죽음>. 홍성광 옮김. 민음사. 2013. p.84~85.)

카미유 역시 에로셰셸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하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카미유는 희미하나마 혁명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그는 향락을 추구하는 인간적 특성을 부각시킵니다. 쾌락과 사랑을 원하는, 바쿠스(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해당, 로마 신화에서 술의 신)적인 인간의 욕망은 “수녀의 베일”로 가릴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카미유는 혁명의 상징이 마라(자코뱅파 내에서도 급진적이었던 산악파의 일원으로 공포정치를 추구하였다.)와 샬리에(자코뱅파인 샬리에는 1793년 5월 왕당파가 주도한 반정부 봉기에 의해 처형당했다.)가 아닌 에피쿠로스(쾌락주의를 설파함. 하지만 그의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평안에 더 가깝습니다.)와 베누스(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 로마신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카미유는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가 주도한 공포정치가 인간적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한복판에서 온 몸을 녹이는 사랑을 찾다니. 지나치게 낭만적입니다. 하지만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인간적인 욕망의 한 부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혁명의 급박성이 아니라 혁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라면 카미유의 통찰은 귀기울일 구석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억압하며 지속될 수 있는 혁명은 없으니까요.

 

안제이 바이다, <당통>(1983)ⓒGaumont International.

안제이 바이다 <당통>, 혁명의 지속가능성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보편적인 질문은 돌고 돌아 현대의 혁명가들에게도 도달합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폴란드 역사의 혁명적 전환을 이끌어낸 ‘연대노조 운동’의 활동가이기도 했던 안제이 바이다(1926~2016)는 이 질문의 일환으로 영화 <당통>(1983)을 연출합니다. 그는 폴란드 공산체제에 저항하여 자유를 지향한 연대노조 운동에 참여하며 카미유와 에로세셸 그리고 당통이 제기한 질문을 다시 소환합니다. 영화에서 당통(제라르 드파르디외)은 로베스피에르(보이치에흐 프쇼니아크)와 마지막으로 독대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소설 속의 영웅처럼 행동하길 바래요.
당신이 잊은 건 우리가 살과 피로 이루어졌다는 거요.
당신은 우리가 숨 쉴 수 없는 고도까지 우리를 끌어올리려고 한다고
그래서 혁명을 외롭게 만들지. 혁명을 얼어붙게 한다고.
가장 뜨거운 호응도 얼려버리지...
우리 수준으로 돌아와요. 지금 바로...사람들은 먹고 잠자고 싶어 평화롭게.
빵이 없으면 법이 없어. 자유도 정의도 공화국도 없다고."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타협책을 거부하며 공포정치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거라고 항변합니다. 그의 말에 당통은 격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한 인간의 행복을 원한다고? 당신은 인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어떻게 당신이? 스스로를 봐. 술도 안 마시고. 분칠이나 하고. 검이 당신을 창백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뭐라는지 아나? 당신은 여자하고 자지도 않는데.
뭘 위해서 연설하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길 원한다고?
하지만 당신은 사람이 아냐. 내가 사람을 보여주지. 거리를 걸어보라고."

신구 할배식으로 표현하면 “니들이 인간을 알아?” 같은 일갈. 인간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혁명을 한다고! , 같은 사자후. 당통은 얼마 후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 역시 당통이 처형된 지 몇 달 후인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게 되죠. 로베스피에르의 운명은 당통의 경고를 상기합니다. 공포정치가 혁명을 외롭게 만들고 얼어붙게 하고 있다는. 당통과 그의 동료들이 제기한 인간에 관한 질문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역사적 격변기에나 해당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꺼운 고서들로 채워진 도서관에서나 회자될 유물이자 고담준론에 불과할까요.

 

하지만 그것은 (루소나 홉스식의)사회계약 이전에, 정치적 혁명 이전에, 이념갈등과 정책 논쟁이전에 가장 선행되어야할 물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쾌락적 존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통의 말대로 인간이 살과 피로 이뤄졌음을 망각할 때가 많지만 인간이 빵 대신 장미를 원할 때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기 십상이니까요. 시민의 책임과 역할을 훈계하기 전에 우리는 새삼스레 인간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