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와 프로이트의 동일시 이론
안녕하세요. 키노캔버스 큐레이터 별그물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프로이트의 동일시 이론을 통해 능동적으로 영화를 보는 방법에 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하루하루 걷는 길이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미지의 장소로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하죠. 그 곳에서 화려한 축제와 스릴 넘치는 모험, 낭만적인 사랑이 펼쳐지길 바라죠. 그런데 사실 영화를 감상 한다는 것은 간접적이나마 우리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합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한 편의 이야기를 듣거나 한 편의 영상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동일시를 통해 작품 속 세계로 들어갑니다. 영화 <플레전트빌>에서 주인공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흑백 시트콤의 세계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컬러를 지닌 주인공은 온통 흑백인 시트콤의 세계 속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영화 속 인물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렇게 영화 속 세계에서 살아보는 일입니다. ‘동일시’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저서 <집단 심리학과 자아의 분석>에서 사용한 개념입니다. 동일시는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사람과 사물, 대상을 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대상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그 대상을 닮고 싶거나, 그 대상에 마음이 쓰인다는 것이겠죠. 프로이트는 동일시를 ‘감정적 유대’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동일시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동일시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권위적인 지도자에게 동일시하는 것 등의 수직적 동일시, 친구나 형제에게 동일시하는 것 등의 수평적 동일시, 지나치게 어떤 대상에 억눌리고 집착하는 과잉 동일시, 대상에 대한 유대감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과소 동일시가 있습니다. 그러한 동일시의 구체적 양상에 따라 그 동일시가 좋은 동일시인지 나쁜 동일시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를 관람하면서 어떤 대상에 동일시하게 되는 걸까요? 보통 우리는 영화 속 인물 혹은 내포작가에 동일시하게 됩니다.
내포작가란 용어가 생소하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포작가란 실제작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저자의 이름은 쓰여있지만 내포작가의 이름은 알 수가 없죠. 내포작가는 실제작가가 아닌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작가로, 화자를 통해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이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실제작가의 의도나 생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좀 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내포작가라는 존재를 설정하게 된 것입니다.
내포작가가 영화에서 화자를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면 화자는 누구고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카메라가 화자일 것입니다. 화자의 입을 통해 소설이 전개되듯이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이미지와 이야기가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설의 주체처럼 영화 역시 카메라를 통해 인생은 이러저러한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같은 인생관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내포작가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작품에서 말하는 주제, 즉 인생관을 이해하고 그 주제가 자아내는 감정에 공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동일시한다는 것이, 그 대상이 항상 우리가 좋아할만한 대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를 안 봤다면 분명 내가 좋아할만한 인물이 아닌 악당이라도, 영화를 보며 그 인물을 동일시하게 되면 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령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폭력 조직과 손잡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부패 공무원 최익현이나 폭력 조직의 두목으로 최익현과 함께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최형배나 모두 나쁜 놈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들이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최익현이나 최형배가 몰락하지 않기를 응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동일시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영화학자 장 루이 보드리는 자신의 논문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에서 영화가 가진 그러한 동일시의 위력을 우려합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저작에서 동굴의 비유를 말합니다. 묶여 있어 오직 동굴의 벽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짜 라고 믿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이 동굴 밖 진짜 사물, 이데아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이데아의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장 루이 보드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묶여 있어 동굴의 벽만 보는 것처럼 오직 스크린만을 볼 수 있게 고정된 좌석에 앉아 있는 관객은 영화를 진짜 현실과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들이 ‘거울 단계’라는 성장과정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기들이 진짜 거울을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기들은 이때 거울에 비친 어떤 모습을 바라보듯 자신을 하나의 통일된 형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아기들은 거울에 비친 다른 사람의 모습, 즉 자기 눈에 보이는 타인의 형상을 자신이라고 상상합니다. 장 루이 보드리는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이 마치 라캉이 얘기한 ‘거울 단계’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아기가 거울에 비친 타인의 형상을 자신이라고 착각하듯 우리도 영화 속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화의 동일시가 두 가지 단계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을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2차 동일시, 즉 카메라에 대한 동일시로 이어집니다. 이는 앞서 말한 내포작가에 대한 동일시와 같습니다. 내포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영화의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이나 영화의 일부분이 아니라 영화가 전체적으로 전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관객은 영화가 전하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며 자기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장 루이 보드리는 이를 관객이 특정한 주체로 구성된다고 표현합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태양, 이데아, 진리의 반대편에는 동굴,그림자,허위가 있습니다. 그런 도식으로 장 루이 보드리의 이론을 정리해보면 진리의 영역에는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공부하는 시네마테크, 그리고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예술영화 또 이 영화들이 주는 정치적 각성의 효과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돈이 되는 영화만을 상영하는 상업극장 그리고 그곳에서 상영되는 오락영화, 그리고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주입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입니다. 장 루이 보드리의 이론은 유럽 예술 영화를 옹호하고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슈퍼맨> 시리즈를 비롯한 미국의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영웅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미국이 세계를 지킨다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 루이 보드리의 이론은 현실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는 실상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가령 관객이 언제나 영화에 몰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과소동일시처럼 실제로는 영화를 동일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극장에 앉아있으면 딴 짓을 할 가능성이 줄어들긴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흥미롭지 않으면 관객들은 극장에서도 졸거나 딴 생각을 합니다. 하물며 집에서는 산만한 태도로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아서 영화의 이데올로기는커녕 영화 줄거리도 생각이 안날 때가 많습니다.
또한 그의 이론은 관객을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관객들은 많은 경우 영화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감상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는 좋은 동일시란 내가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동일시라고 말합니다. 남에게 그저 휩쓸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중심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도 살피는 동일시 말입니다. 저는 영화를 볼 때도 좋은 동일시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 열심히 하고 계시죠? 좋은 동일시를 위해서는 영화에서도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과소 동일시처럼 영화에 집중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사람 관계도 사이가 좋아지려면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더욱 잘 보기 위해서 거리를 두라는 것이죠. 물론 영화를 보며 동일시와 거리두기를 동시에 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다 자칫 영화를 온전히 즐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미나리>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 배우님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큰 화제가 된 작품이죠.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인물에 대한 배경설정이 너무 구체적이면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인물을 동일시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며 인물을 판단하고 분석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영화 자체가 특정한 감상의 효과를 위해, 거리두기 혹은 낯설게 하기를 유도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일부러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예술영화라고 분류되는 영화들 중에 그런 작품들이 많죠. 그런데 이번 시간에 제가 말하는 거리두기는 관객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경우입니다. 정이삭 감독의 말처럼 영화를 보면서 거리두기를 하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영화를 다시 보거나 나중에 찬찬히 복기하는 식으로 거리두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거리두기는 동일시와 마찬가지로 인물에 대한 거리두기, 내포작가에 대한 거리두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동일시한 인물에 대해 거리를 두고 그 인물에 대한 가치판단을 해봅니다. 영화 속 특정 캐릭터에 동일시하게 되면 무조건 그 인물에 공감하고 그 캐릭터를 응원하게 되죠. 영화가 끝나고 거리두기를 해보면 아마도 ‘역시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하면서 그 캐릭터를 긍정하거나 반대로 ‘내가 생각한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야“ 혹은 ‘생각해보니까 나쁜 놈이었어’라며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겠죠. 내포작가에 대한 거리두기 역시 마찬가집니다. 내포작가를 동일시하면 영화가 말하는 인생관을 이해하고 그 정서에 공감하게 됩니다. 혹은 장 루이 보드리가 말한 대로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 할 수도 있습니다. 내포작가에 거리를 두고 작품이 말하는 인생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해봅니다. 이때도 “맞아 인생이란 그런 거지” 하면서 내포작가의 목소리를 긍정하거나 혹은 “이 영화는 인생에 대해 너무 냉소적이야”하면서 비판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리두기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프로이트는 동일시란 “내 마음에 새로운 인물들이 담기고 그들의 이야기가 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영화와 비슷한 인물과 이야기만 존재한다면 거리를 두고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영화와는 다른 인물과 이야기들이 존재해야 영화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시나무>의 노래가사처럼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존재해야 거리두기가 가능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내가 어떤 인물을 동일시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부분과 그 사람의 한 부분이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A라는 관객과 B라는 관객이 모두 영화 속 한 인물을 동일시한다고 해도 동일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릅니다. 내 안에 어떤 것들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동일시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가령 관객은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의 어머니를 동일시하거나, 친구를 동일시하거나, 혹은 영화 속에 나온 물건을 내 마음속에 있는 추억의 사진과 동일시 할 수도 있습니다.
관객의 내면에 폼샘폼사 ‘허세왕’, 삐질삐질 ‘소심킹’ 그리고 스윗한 ‘사랑꾼’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면 영화 속에서 더욱 많은 캐릭터를 동일시할 수 있고 영화가 말하는 인생관을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 있는 각각의 캐릭터에 따라 동일시a, 동일시b, 동일시c 이렇게 3가지 동일시가 일어난다면 동일시a에 대해서 동일시b의 관점에서 거리두기를 할 수 있고, 동일시b에 대해서는 동일시c의 관점에서 거리두기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내면의 대화 같은, 이러한 동일시와 거리두기를 통해 작품을 감상한다면, 영화를 훨씬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시가 인물과 내포작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영화 텍스트 안쪽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거리두기는 영화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입니다. 동일시를 통해 영화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영화 바깥으로 멀리 나가 인문, 사회학적인 질문을 던질수록 관객은 주관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영화를 인문, 사회학적으로 확장할수록 영화 텍스트를 더욱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은 기택, 충숙, 기정, 기우, 가난하지만 단란한 한 가족의 시각에서 진행됩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이들 가족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심지어 기택 가족의 사기극, 이 팀플레이를 응원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거리두기를 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택 가족이 궁핍한 처지이고 박사장네 집에 취업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더라도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행각은 범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가족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근본원인을 생각해보면, 번듯한 중산층이었지만 몰락한 기택 가족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생충>의 내포작가는 우리네 삶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영화가 기택네나 박사장네, 어느 한쪽의 편을 든다기 보다 이런 희비극이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현실, 계층 양극화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비극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포작가를 동일시한 관객은 그런 사회현실에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포작가에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기택네와 문광네 부부가 반드시 그렇게 극한 대립을 해야 했을까? 그들이 싸우지 않고 협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영화가 현실을 너무 냉소적으로 그린 건 아닌 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좀 더 거리를 두며 영화를 확장해보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대립하고 그 조건을 어떻게 바꿔야 협력할 수 있는지를 영화를 매개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영화 <조커>역시 후일 조커가 되는 아서의 시각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레 조커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를 전복하려는 조커의 행동을 영웅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무분별하게 사람을 죽이는 조커의 폭력은 영웅적인 것이 아니라 분노의 배설이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생각해보면, 사회의 무관심과 기회의 단절 속에서 절망하여, 폭력적으로 변한 아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조커>의 내포작가는 조커를 영웅적으로 표현하며 약자를 멸시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아무리 사회에 문제가 많다 해도, 조커처럼 폭력적인 방식의 저항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한계를 가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거리를 두며 영화를 확장해보면 과연 사회적 저항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동일시란 꼭 영화를 볼 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담론, 소위 영화에 대한 해석과 다양한 이야기들이 공론화되는 영역에서도 동일시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직적 동일시를 많이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권위 있는 누군가의 관점을 내 것인 양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죠. 권위에 짓눌리거나 나만 모난 돌이 되는 것 아닌가 싶어 동일시를 하게 됩니다. 영화 담론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유명한 평론가나 학자가 내놓는 영화 해석을 정답처럼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정답풀이가 아닌데 말입니다. 반면 수평적 동일시는 어떤 영화해석을 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등한 동일시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동일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한편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영화 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처럼 찐한 동일시를 체험해봅시다. 그리고 영화에서 빠져나와 비판적인 거리두기를 하며 내 마음속에 담긴 것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들, 우리가 사는 세계의 풍경들에 비추어 영화를 인문, 사회학적으로 확장해서 감상한다면 좋은 동일시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좋은 동일시를 통해 능동적으로 영화를 읽는다면 영화감상이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운 체험이 될 것입니다.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