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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교육

영화의 건축적 구조(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by 별그물 2022. 2. 26.

지난 글에서 영화의 건축적 구조에 관해 알아보았다. 

 

2022.02.22 - [영화 교육] - 영화의 건축적 구조(서사, 해석, 담론)

 

영화의 건축적 구조(서사, 해석, 담론)

케익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스크린이나 모니터를 통해 보는 영화는 케익의 윗면과 같다. 우리는 케익위를 덮고 있는 생크림과 과일들, 예쁜 장식들을 보면서 그 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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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건축적 구조와 그에 대한 세부요소들은 아래와 같다. 

●서사공간(내러티브): 
-플롯(플롯의 구조 등), 캐릭터 

●해석공간(미학): 
-촬영(프레이밍, 카메라 워크, 심도, 시점 쇼트, 카메라 앵글, 쇼트의 크기, 필터, 포커스, 조명 등)  
-편집(커트, 디졸브, 페이드, 연속편집_쇼트/리버스 쇼트, 매치컷, 180도 법칙 등, 불연속편집_점프컷 등, 교차편집, 편집 속도/리듬, 몽타주 편집 등) 
-미장센(세트, 소품, 의상, 메이크업, 색감 등)
-사운드(내재음향, 외재음향, 폴리 사운드, 평행 사운드/대위법적 사운드 등)  
-연기

●담론공간(영화의 콘텍스트, 관객의 생각과 감정): 
-작가주의, 상호텍스트성, 이데올로기, 장르, 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등

 

 

지난 글에서 얘기한대로 할리우드 고전기의 거장 존 포드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통해 영화의 건축적 구조를 가늠하는 활동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자. 핵심은 <리터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영화를, 평면적으로가 아니라 건축적으로, 최대한 두텁게 읽어내는 것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포스터(제작사: Paramount Pictures)

 

대략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이야기로 추정되는,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존 포드의 기존 서부극과 달리 대부분 실내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영화는 미국 서부의 ‘신본’이라는 마을에서 진행되는데, ‘리버티 밸런스’는 신본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악명높은 악당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서부 사나이, 거칠고 자유분방한 총잡이 톰(존 웨인)과 동부에서 서부로 건너온 변호사이자 법과 질서를 중시하는 랜스(제임스 스튜어트), 대립되는 두 인물이 어떻게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에 맞서 마을을 지키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노인이 된 랜스가 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년만에 신본에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미지들 출처: 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이미지, 영화 제작사: Paramount Pictures)

 

해석_촬영_카메라 앵글

신본역에 열차가 도착하면 랜스와 그의 아내 할리가 기차에서 내린다. 신본에서 젊은날을 보낸 할리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바라보는데, 그곳에는 옛날 신본의 보안관이었던 링크가 그들을 마중나와 있다. 이때 카메라의 앵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할리의 모습은 눈 높이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아이레벨’로 촬영된 반면에 맞은편에 있는 링크는 아래쪽에서 찍는 ‘로우앵글’로 촬영되었다. 왜 앵글의 차이를 통해 두 인물을 대비시킬까? 통상 ‘로우 앵글’은 인물을 크게 느껴지게 해, 권위를 부여하거나 위압감을 주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영화를 좀 더 보면 알겠지만 링크는 과거에나 현재나 권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에 가깝다. 더구나 현직 상원의원이고 정치권의 거물인 랜스에 비하면 링크는 늙고 쇠약한 인물에 불과하다.  

이 때 영화는 앵글의 차이를 통해 할리, 랜스와 대비하여 링크 그리고 신본이라는 장소가 상당히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할리와 랜스가 수십년만에 신본을 방문한 이유와 연관돼 있을 것이다. 

 

해석_촬영_프레이밍, 카메라워크 

죽은 톰의 관을, 침울한 표정으로 지키고 있는 이 남자. 톰의 하인이었던 폼피다. 카메라는 서서히 이동하며 폼피의 모습을 자세히 프레이밍한다. 여기서 영화는 폼피를, 단독으로 프레이밍하여 인물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는 영화 상에 등장한 인물 중 유일한 흑인이다.

 

해석_촬영_프레이밍

랜스는 톰이 안치된 관을 들여다본다. 랜스의 시점쇼트로 죽은 톰의 모습이 나올법도 하지만 관에 눕혀진 톰의 모습은 프레임에서 배제된다. 톰의 현재 모습은, 관객들이 그가 지난 수십년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될테다. 아마도 영화는 그의 지난 세월을 공백으로 남기기 위해 그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아닐까 싶다. 랜스는 신본 지역의 신문 기자들에게 자신이 신본에 온 이유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젊은 시절을 회고한다.   

 

해석_촬영_프레이밍 

이제 막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랜스는 신본으로 가는길에 악명 높은 악당 리버티 밸런스를 만나 고초를 겪는다. 의협심이 강한 랜스는 리버티 밸런스에게 대항하다가 채찍으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게 된다. 이때 리버티 밸런스의 발 아래 쓰러져 있는 랜스의 비참한 모습이 프레임 안에 있다가 리버티 밸런스가 채찍을 휘두르려는 찰나에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후 이 씬에서 랜스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랜스는 왜 프레임 밖으로 사라졌을까? 

 

해석_촬영_시점 쇼트

만신창이가 된 랜스를 발견하고 마차에 태운 톰은 할리가 일하는 식당 한켠에 그를 누인다. 이 때, 누구의 시점 쇼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할리나 톰의 시점으로 보이는 랜스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앞서 구타당하는 랜스의 모습이 프레임에서 배제된 이유를 알듯하다. 할리나 톰의 시선으로, 랜스의 처참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이 랜스나 할리를 동일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관객이 캐릭터를 동일시하여 영화가 안내하는 서사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것은 내러티브룰 구성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를 할리의 시점쇼트로 해석하면, 관객은 랜스에 대해 따뜻한 연민을 품게 되는 할리의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톰의 시점쇼트로 본다면,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다 다친 랜스를 한심하게 보는 톰의 감정에 이입하게 될 것이다. 톰은 리버티 밸런스를 감옥에 집어넣겠다는 랜스에게 여기서는 그런 문제를, 법이 아니라 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톰은 리버티 밸런스와는 다른, 나름 정의로운 총잡이지만 개인의 힘에 의한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법적 정의를 추구하는 랜스와 극명히 대조된다. 향후에 관객이 톰이나 랜스 혹은 할리, 어느 캐릭터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인지하는 ‘이야기’도 달라질 것이다. 

 

해석_촬영_프레이밍

이 쇼트의 프레이밍은 프레임의 테두리가 아닌 프레임 내부의 구성을 살펴봐야 한다. 톰과 할리 그리고 식당 주인 노라가 화면 왼편에 한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고 랜스는 오른편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톰 대 랜스, 총(폭력) 대 법의 대립축이 명확히 드러난다. 영화 감독이자 이론가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말대로 프레임 내부의 대립적 구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몽타주, 쇼트와 쇼트의 대립 관계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할리는 “신본마을에도 법과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프레임의 오른편으로 이동한다. 할리의 이동으로 비교적 대등한 대립관계가 형성되며 이는 쇼트와 쇼트의 대립을 팽팽하게 만들어 역동적인 전개를 활성화 한다.

 

해석_촬영-조명

톰은 할리에게, 일이 있어 마을을 잠시 떠난다고 말하고 문밖을 나선다. 이 쇼트는 명암대비가 뚜렷한 ‘하드라이트’ 조명으로 촬영되었다. 할리에게 빛이 비치는 반면 톰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그는 어둠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이는 총으로 상징되는 톰의 시대가 저물어감을 나타낸다. 

 

해석_촬영_프레이밍

랜스는 신본에서 글을 읽을줄 모르는 마을 사람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게 된다. 이 떄 카메라는 히스패닉(라틴아메리카 출신의 미국인)아이들을 화면에 꽉차게 프레이밍한다. 아이들은 알파벳 노래를 부른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곧이어 랜스가 알파벳 노래를 잘 부른 아이들을 칭찬하는데, 이때 랜스의 뒷편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사진과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보인다. 이 미장센, 소품의 배치는 랜스가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하듯, 리버티 밸런스와 같은 악당들에 맞서 톰 같은 총잡이들이 각개전투를 하는 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면, 사회계약을 통해 수립된 미합중국에서는 독립선언문과 미 연방 헌법과 같은 법적 질서가 그러한 개인과 사적 집단의 폭력을 대체한다. 앞서 히스패닉 아이들을 프레이밍한 것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천명하는 가치,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연권’을 상징한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앞서 단독으로 프레이밍됐던 폼피가 다시 프레이밍될 때 왼편을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진이 보인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은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를 철폐한 지도자로 잘 알려져있다. 흑인인 폼피의 자리 왼편에 링컨의 사진을 배치한 미장센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 때 폼피는 지난 수업때 배운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에 대해 얘기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지만 폼피는 독립선언문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한다. 특히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의 구절에서 머뭇거린다. 이는 링컨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위대한 가치, 흑인도 백인과 대등한 미국의 일원이라는 법적 선언이 현실에서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현실은 뒤늦게 교실에 들어선 톰이 폼피에게 학교에서 노닥거리지 말고 가서 일하라며 명령하는 장면을 통해 부각된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왼쪽에 랜스, 가운데에 언론인 피바디, 오른쪽에 톰이 한 화면에 프레이밍된다. 랜스와 톰 사이에 링컨의 사진이 보인다. 랜스는 폼피를 함부로 대하는 톰의 태도를 나무란다. 링컨이 지향하는 평등의 가치를 사이에 둔, 둘의 대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프레이밍이다. 그런데 이 프레이밍이 묘한 것은 링컨이 가진 양가성 때문이다. 링컨이 추구한 노예해방, 평등의 가치는 랜스의 윤리적 신념과 합치된다. 하지만 그 노예해방은 남북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쟁취된 측면이 강하다. 그렇게 보면 링컨의 정치적 성취는 톰으로 상징되는 총의 위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리버티 밸런스는 사실 단순한 무뢰한이 아니다. 그는 신본이 속한, 피켓와이어강 남부의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강 북부의 대목장주들이 고용한 총잡이다. 랜스는 피켓와이어강 남부의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해서 해당 지역을 미국 ‘주’의 일부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목장주들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톰은 “선거가 총을 이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에 견줘 생각해보면 톰의 견해는 단순히 폭력을 앞세우는 태도가 아니다. 남북전쟁도 노예들을 임금 노동자로 편입시켜야 하는 북부의 산업자본가들과 노예들을 소유한 남부 지주들의 경제적 갈등에 가깝다. 톰은 피켓와이어강 북부와 남부의 계급갈등이 결국 폭력적인 사태로 분출됐을때 그런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건 허울좋은 법이 아니라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생각할테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톰은 할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할리가 랜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해, 신경이 쓰인다. 톰은 할리에게도 학교에 있지 말고 식당일을 하라며 명령조로 얘기한다. 할리에 대한 그의 애정은 상당히 가부장적이다. 할리는 그건 내 자유라며, 톰의 수직적 태도에 맞선다. 할리의 왼편에 링컨의 사진이 보이는데, 링컨이 지향하는 평등의 가치를 확대 해석했을 때 그것은 남녀평등의 목소리도 포함할 것이다.

 


해석_촬영_프레이밍, 시점쇼트  

랜스에게 채찍을 휘두를 때와 마찬가지로, 리버티 밸런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피바디를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그런데 랜스를 때릴때와 마찬가지로 채찍을 집어들자 피바디의 모습이 프레임에서 배제된다. 이는 앞서 랜스의 처참한 몰골이 톰 혹은 할리의 시선으로 보인것과 마찬가지로 이후 랜스가 피바디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다. 관객은 랜스의 시선으로 피바디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정신적으로 각성하여, 리버티 밸런스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랜스의 심정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해석_촬영_심도, 프레이밍

랜스는 리버티 밸런스와의 결투에 임한다. 그가 견지해왔던 신념과는 반대로 총을 들게 된것이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에 가깝다. 그는 윤리와 정치의 차이를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법적 질서는 아직 미약하기에 무도한 리버티 밸런스를 단죄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테다. 랜스가 리버티 밸런스와 마주하는 장면은 깊은 심도로 촬영되어 프레임이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명사수인 리버티 밸런스와 샌님에 가까운 랜스의 대결은 불보듯 뻔할테다. 역시나 랜스는 리버티 밸런스의 총격에 상해를 입고 수세에 몰린다. 하지만 놀랍게도 랜스가 최종 승자가 된다. 랜스가 가까스로 총 한발을 쏘자 리버티 밸런스는 무기력하게 고꾸라진다. 어찌된 일일까? 둘의 대결을 입체적인 구도로 멋있게 표현하기 위해 깊은 심도가 활용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트릭일 수도 있다. 관객은 내화면(프레임 내부)의 널찍한 시야 덕분에 외화면(프레임 바깥)을 망각하게 된다. 이후에 밝혀지지만 사실 리버티 밸런스를 쓰러트린 것은 랜스가 아니라 외화면에서 총을 쏜 톰이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랜스는 리버티 밸런스가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는 별안간에 악당을 해치운 영웅이 된다. 할리의 마음도 랜스에게 확실히 기운다. 톰은 할리의 사랑과 영웅의 자리 모두 랜스에게 양보한다. 톰이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선다. 그는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이 프레임에서 뒤 벽면에 걸려있는 총 세자루가 마치 톰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톰이 리버티 밸런스를 쏜 것이 실은 자기 자신을 쏜 것, 자살에 가까운 행동이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게 랜스가 아니라 톰이라는 것은 영화 말미에 밝혀지는 내용이기에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영화를 다시 봐야 알 수 있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신본을 포함한, 피켓와이어강 지역의 대표자들이 모여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자를 뽑는 지역 의회가 열린다. 이 선거의 쟁점은 해당 지역을 ‘주’로 승격시켜 미국 연방의 통합적인 질서에 편입할 것이냐 아니면 독립적인 영토로 남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역의 경제적 질서를 둘러싼 농민들과 대목장주들의 대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진지한 대의민주주의의 장에 난데없이 말이 등장한다. 목장주들을 대변하는 대표자 중 한명이 자신의 기세를 과시하기 위해 동원한 말이다. 의장석 위로 난입한 말은 목이 말랐는지 컵에 담긴 물을 먹기까지 한다. 이 촌극은 부산한 선거의 풍경을 그저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는 걸 넘어 정치에 관한 본질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듯 싶다. 정치란,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의 품위 있는 모습처럼 합리적인 이성의 무대로 보이지만 인간이 가진 동물적 특성들, 본능, 직관, 감정 같은 요소들은 그 무대에서 요란하게 판을 치기 마련이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작가주의, 상호 텍스트성, 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피바디는 국회의원 후보로 랜스를 추천한다. 하지만 대목장주들을 대변하는 지역의 대표 스타버클은 랜스가 리버티 밸런스를 죽인 사건을 거론하며 살인자가 후보가 되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피묻은 손”을 가진 랜스가 토머스 제퍼슨(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이자 미국 3대 대통령)과 링컨의 영혼이 있는 워싱턴으로 가선 안된다고 말한다. 링컨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존 포드 감독의 <청년 링컨>(1939)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2012) 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청년 링컨>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전도유망한 변호사가 정치인이 돼가는 과정을 그린다. 법적 질서의 테두리를 넘어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랜스는 링컨을 연상시킨다. 

스필버그의 <링컨>은 정치의 본질이 “피묻은 손”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링컨>은 노예제를 폐지하는 수정 헌법 13조가 미국 하원에서 통과되는 과정을 그린다. 수정 헌법 13조가 통과된 후, 노예제 철폐에 앞장서온 공화당 강경파의 수장 스티븐스는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남자의 지원하에,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법안이 부패를 통해 통과되었다”라고 말한다. 순수와 부패의 조합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영화 <링컨>에서 링컨은 협박, 매수와 같은 부정한 수단들까지 동원하여 정의를 관철시킨다. 독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링컨>은 순수와 부패를 조합하는 모순적인 기예없이 법안의 통과가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철학자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단순히 경제적인 질서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조화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신적인 섭리를 일컫는다. “피묻은 손”은 동물적인 “피’와 신적인 “손”의 모순적인 결합이다. 이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폭력비판을 위하여」에서 말한 ‘신적 폭력’과도 맞닿아 있다. 그것은 법을 파괴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적 폭력이다. 스타버클의 말과 달리, 미국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되는 과정처럼 정치는 ‘피묻은 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관객은 이를 통해 그 정치적 폭력이 어떤 조건에서 정당화될 수 있으며, 어느 선까지 용인될 수 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순결한 신념을 가진 랜스는 스타버클의 비판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한다. 그는 자신이 손에 피를 묻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현장을 떠난다. 톰은 그런 랜스에게 다가와 사건의 진실을 알린다. 그 때 담배연기에 휩싸인 톰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되는데 그의 얼굴은 점차 연기처럼 희미해진다. 이후, 앞서 랜스와 리버티 밸런스의 대결장면의 외화면이 드러난다. 랜스의 오른편에 멀찍이 서있던 톰이 랜스가 총을 쏘는 것과 동시에 리버티 밸런스를 총으로 쏜다. 톰은 랜스에게, 할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기 때문에, 할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한거라고 말한다. 톰의 총에서 새어 나오는 포연은 담배연기처럼 톰을 휘발시킨다. 연기에 휩싸여 진실을 알리는 톰의 얼굴은 영화의 시간순서상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톰은 연기처럼 흩어져 유령적인 존재로 남는다. 톰의 고백 덕분에 도덕적 자존감을 회복한 랜스는 다시 정치적 논쟁의 장으로 돌아간다.   

 

해석_촬영_미장센, 프레이밍
담론_인문학적/사회학적 맥락 

신문사 편집장은 랜스의 이야기를 신문에 싣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전설은 전설 그대로 남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정치인 랜스의 신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그 서부의 전설이 훼손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할리와 랜스는 신본을 떠난다. 할리는 톰의 관위에 준비해 온, 선인장 꽃을 놓아둔다. 영화는 끝내 죽은 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선인장꽃이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된다. 톰은 유령적 존재가 됐기에 프레임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할리가 떠난 이후 톰은 폐인처럼 살아갔을테다. ‘선인장꽃’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물건이다. ‘선인장꽃’은 모순적인 사물이다.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의 척박함, 거칢과 꽃의 화사함, 우아함이 결합돼있다. 우아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 거친 선인장이 필요하다. 랜스는 그 꽃을 보고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 ‘선인장꽃’은 랜스의 ‘피묻은 손’을 환기시킨다. 

랜스는 할리에게 워싱턴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신본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이로써 그가 오랜 세월 중앙정치에서 느낀 어떤 환멸, 그의 순수함을 훼손시킨 ‘피묻은 손’에 대한 피로감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순수했던, 신본에서의 옛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랜스는 자신에게 아낌없는 배려를 베푸는 신본의 철도원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그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위한 일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한다. 랜스는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자신을 지탱해온 전설이 진실이 아닌 거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랜스는 ‘리버티 밸런스’에 맞서 정의를 관철했지만 그것은 톰의 사적 폭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랜스의 당혹감은 단순히 개인적인 가책이 아니라 그의 신념이 가진 근원적인 불완전성, 즉 정의의 승리를 말하는 정치가 은폐해온 진실, 불가피한 모순을 상기한 데서 비롯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표면적으로는 비화가 곁들여진 영웅의 일대기 혹은 성장기 같다. 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그 비화는 영웅을 지탱해온 신화를 전복한다. 랜스가 돌아가고 싶은 곳, 그가 그리워하는 목가적이고 순수한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갈 곳이 없다. 랜스는 담배를 피려다가 철도원의 말을 듣고 담뱃불을 끈다. 그의 순수, 영웅적 서사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최후에 남는 것은, 잡히지 않는 유령적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