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과 인간의 자족성
사람은 자족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화분 하나를 들때도 손 하나가 더 필요해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죠. 작은 일상에서도, 홀로 할 수 없는 일이 꽤 많습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1651)에서 자연권이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합니다. 이 때 타인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그의 자유를 위해 나를 공격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자유는 가장 근본적인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론은 슬그머니 인간은 자족적인 존재라고 전제합니다. 사람은 본래 자유롭고 혼자여도 충분하지만, 타인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루소는 군주제를 옹호하는 홉스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1762)에서, 우리의 고유한 생명과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당한 말이지만 이런 설명은 인간의 삶과 사회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뭔가 빈약합니다. 홉스와 루소에게, 사회계약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는 인간의 자족성을 타인이 깨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회계약에서 인간이 가진 결핍이란, 타인의 지배에 맞설 힘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오직 힘의 균형을 위해 타인과의 협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홉스와 루소가 정의하는 '자유'는 그렇게 납작한 개념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홉스, 루소, 존 스튜어트 밀, 애덤 스미스 등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홉스와 루소가 사회계약을 도출하는 맥락에서는 '자유'가 평면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좋은 삶, 재밌는 삶, 사랑하며 사는 삶은 홀로 이룰 수 없으며 심지어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도 타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사회계약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생존만을 위한 사회계약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이 계약 속 사회에는 타인과 나누는 소소한 유머도, 짜릿한 모험도, 로맨틱한 스토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갑과 을의 힘을 조정하고 분배하는 조항으로만 이뤄진, 건조한 계약은 쌍방이 적극적으로 화합을 도모하기에 불충분합니다. 사회계약의 최소 요건만으로 사회 구성원이 결속하거나 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2021/01/19 - [영화, 시민을 건축하다] - 안제이 바이다 <당통>, 인간이란 무엇인가
안제이 바이다 <당통>, 인간이란 무엇인가
뷔히너 <당통의 죽음>, 에로세셸과 카미유가 말하는 '인간' 우리 사회에서 ‘시민’이란 단어가 화두로 떠오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견지에서 사회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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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당통>(1983)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사회계약 이전에 선행돼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생존을 보장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미건조한 사회계약이라도 기꺼이 동의할 것입니다. 루소의 추종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같은 급박한 혁명 정국에서, 생존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공안위원회에 양도하는 '사회계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에 대립하며 당통이 제기하는 의문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계약은 지속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급진적인 혁명가지만 당통은 보수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보기 힘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사회계약이 혁명의 열기와 동력을 파괴하기 때문에 급진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통의 입장은 정치적 좌우의 구분선이 아닌,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평가돼야 합니다. 당통을 인문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인문주의자는 정치적 이념 이전에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켄 로치의 인문주의
영국의 영화감독인 켄 로치가 오해되는 지점도 그 부분인 것 같습니다. 켄 로치의 앞에는 늘 관용어처럼 '좌파 감독'이라는 명칭이 따라붙습니다. 물론 켄 로치의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좌파적인 관점에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철도 민영화를 비판하는 <네비게이터>(2001), 자본의 대척점에 서 있는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하층민들>(1991), <빵과 장미(2000), 영국의 보수적 복지제도를 비판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사적 사건에서 좌파적 입장을 옹호하는 <랜드 앤 프리덤>(1995), <칼라 송>(1996),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2006), <1945년의 시대정신>(2012), <지미스 홀>(2014) 등,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정치적으로 좌파적 좌표에 위치 해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 선수가 골문 왼쪽 방향으로 슛을 차는 것이, 골을 넣고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듯, 켄로치의 영화에서도 정치적인 관점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차원을 봐야 합니다.



가령 <네비게이터>는 단지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네비게이터>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가진 특유의 활력과 눅진한 유머, 끈끈한 유대는 민영화 정책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생계가 곤란해 실업급여가 절박한 노동자가, 냉담하고 관료적인 제도 앞에서 좌절하는 과정을 통해, 영국의 신자유주의적 복지제도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비판이 단지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영화의 울림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겁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벼랑끝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작은 선의로 연대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실직자 다니엘과 싱글맘 케이티를 통해,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인간성과 피상적인 복지 제도를 대비시킵니다. 켄 로치는 신자유주의적 복지제도가 인간성의 넓은 스펙트럼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시스템은 단지 경제적 생존과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성의 협소한 측면만을 대표할 뿐 입니다.
켄 로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얼핏 보면, 확고한 신념으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켄로치의 역사극에는 다중이 둘러 앉아 토론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가령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에서, 급진적인 맑스주의를 추구하는 poum(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군대는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과 싸우는, 당면 과제에 집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주의 땅을 소작농에게 분배하는)토지 개혁같은 혁명 과업도 단행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논쟁합니다. 그러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정치적 노선이 진정 인간을 위한 것인지 성찰하기 때문입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우는 IRA(아일랜드 공화군)소속인 데미안은, 조직을 배신한 마을 친구 크리스를 처형하고 나서, 정치적 이상이란 것이 "정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회의합니다.
켄 로치의 영화가 완고한 정치적 관점을 가진듯 보이는 것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늘 결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감상적인 고뇌에 침잠하거나 사건과 거리를 두고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할 여유가 없습니다. 늘 자신과 공동체의 생사와 결부된 현실과 맞닥뜨리며 급박하게 윤리적,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기 떄문입니다. 켄 로치의 영화는 정치적 도그마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군상들을 통해 아름다운 공동체와 사회를 모색합니다. 켄 로치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정치가 실제 인물들 속에 간접적으로 녹아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관객들이 영화의 전체를 통해 따라가게 되는 인물들의 감정적인 인생경로 속에 정치가 스며들어 있을 때, 메시지가 전면에 서는 게 아니라 실제 인물의 한 부분일 때 관객은 감동하게 되고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KINO. 1997.9. 켄 로치 인터뷰 <켄 로치,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켄 로치의 영화가 드러내는 정치적 입장의 저변에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을 위한 공동체와 정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그 질문들은 대개 정치적 입장의 정당성을 뒷받침 하지만 때로는 그 입장을 가장 근본적인 지평에서 재검토 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켄로치의 영화 <하층민들>, <레이닝 스톤>(1993), <내 이름은 조>(1998), <네비게이터>, <다정한 입맞춤>(2004), <루킹 포 에릭>(2009), <앤젤스 셰어>(2012)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듯, 유머를 즐기고 뜨겁게 사랑하며 유대감을 나누는, 넓고 심원한 인간성의 지평입니다. 켄 로치는 "웃음이 정치만큼이나 중요하다고"생각합니다.(KINO. 1997.9. 켄 로치 인터뷰 <켄 로치,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케스>, 켄로치의 인문주의의 출발점
켄 로치의 인문주의적 관점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은 그의 초기 영화인 <케스>(1969)일 것입니다. <케스>는 켄로치의 필모그래피에서 예외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지 않고 정치적인 관점이 거의 드러나지도 않는 작품입니다. <케스>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이기까지 합니다. 영국 요크셔의 탄관촌에서 살아가는 열다섯 살 빌리는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빌리에게는 꿈과 희망이 없습니다. 그저 하릴없이 학교를 다니고 의미없는 나날을 보냅니다. 빌리를 좋은 방향으로 조력해야 할 어른들은 소년의 삶에 무관심 합니다. 역시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른들의 관심과 조력 속에 꿈을 찾아가는 <빌리 엘리어트>(2000)의 빌리와는 대조적입니다.

빌리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인 그라이스는 빌리가 아침마다 신문 배달을 한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한 채, 지각하는 빌리에게 원론적인 훈계만을 합니다. 그는 빌리를 비롯하여 말썽을 피워 불려온 학생들에게, 너희 세대의 문화는 피상적이고 겉만 번지르르 하다며 그 안에 가치있는 것은 없다고 단언 합니다. 급기야 그들 세대는 매스 미디어의 소비자에 불과하다며 거창하고 비장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아이들은 그의 말에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습니다. 이 장면은 묘한 아이러니를 넘어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정작 피상적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아이들이 아닌 교장 그라이스 이기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의 소비자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것은 그라이스가 복무하며, 판에 박힌 직업인만을 길러내는 획일적 교육체계 입니다. 인간의 구체성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어떤 고상한 도덕과 이데올로기든 코미디로 전락하고 맙니다.
빌리는 어른들의 교육과 조력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세계에서 위안을 찾고 성장합니다. 우연히 하늘을 나는 새끼 매를 발견한 빌리는 매에게 '케스'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빌리는 매 훈련에 관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케스를 훈련시킵니다. 빌리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열심히 하기 시작합니다. 빌리가 마련해 놓고 애정으로 들여다보는, 케스의 새장은 그가 유일하게 인간적 존엄을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빌리는 어른들 중 유일하게 그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선생님에게, 케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한테 와서 "그거 길든거니?" 하고 물어요. 세상에, 길들이다니! 매는 길들지 않아요.
훈련될 뿐이죠. 야성과 맹수성을 지닌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빌리는 케스에게 경외감을 가집니다. 케스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빌리는 케스의 유일무이한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도록 조력합니다. 어른들이 자신에게 베풀지 못하는 교육의 정수를, 빌리는 케스를 통해 실천합니다. <케스>는 결코 길들지 않을, 다만 자유롭게 비상하기 위해 배우고 성장할 뿐인 인간성을 얘기합니다. 저는 <케스>가 켄로치의 영화적인 고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케스>는 담백하며, 기교가 없는 켄로치의 형식 미학이 확립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문주의가 출발한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빌리와 같은 아이를 존중하지 않고 그의 구체적인 꿈과 행복을 조력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치적인 이상이든 무용하다는 점, 말입니다.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와 정치를 말하는, 켄 로치의 영화는 그렇게 '한 인간'에 관한 애정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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