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편의 영화와 어떻게 만나게 될까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조사한 2018년 영화 소비자 동향 조사에 의하면 영화 소비자들의 67%가 ‘주변인 평가’에 의해, 55%가 ‘온라인 평점/평가’에 의해 영화를 선택한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가까운 지인들과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작품을 추천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많은 분들이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는, ott에서 추천하는 작품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ott의 추천 알고리즘도 이용자들의 데이터(콘텐츠 사용 데이터나 평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영화 큐레이션의 핵심에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추천 서비스들이 많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주변인의 평가나 추천에 의해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왜 일까요? 우리가 영화를 추천 받을 때 아주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내가 보니까 딱 니 취향 같아서...” 안지 일주일 정도 밖에 안 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황당할 것입니다. 보통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상당 기간 가깝게 지낸 사람입니다. 추천의 정확성에 있어서 그런 지인이 온라인 알고리즘에 앞서는 이유는 소위 ‘마이크로 타겟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속속들이 알기에 좋아할 만한 영화를 세밀하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은 최근에 내 기분이 울적한 걸 알고 밝은 코미디를 추천해줄 수 있고 제주도 여행 가는 걸 알고 여행지에서 볼만한 로드무비를 권할 수도 있죠.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어떤 영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영화 작품이나 취향의 문제는 아닙니다. 영화나 취향에 앞서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에 기반해서 취향이 형성되니 존재의 변화에 따라 취향도 조금씩 달라지겠죠. 어렸을 때 별로였던 영화를 나이 들어 다시 봤는데 너무 좋았던 경험 있으시죠? 반대로 한편의 영화가 영혼을 뒤흔들며 존재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통상 취향이란 더디게 형성되고 변화하며 존재의 변화는 더욱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게 영화 한 편이 불의의 일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존재와 취향, 영화는 서로에게 스며듭니다.
세 가지 범주가 적극적인 대화를 할 때 영화 감상의 경험이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그것은 곧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존재와 취향이 고정된 것이라 가정하고 그에 맞는 영화만 추천받는다면 존재의 성장, 취향의 확장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에서 언급한, 네트워크 이론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한편의 영화가 하나의 노드(점)고 영화들의 세계를 일종의 네트워크라고 봤을 때 그것은 ‘결속형(bonding)자본’만을 형성합니다. 그러니까 비슷한 영화들이 단단한 취향의 클러스터를 형성하지만 바깥 세계와는 단절됩니다.
기존의 클러스터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노드들과 연계성을 맺으며 확장하는 네트워크를 ‘교량형(bridging)자본’이라고 합니다. 영화 감상의 세계에서 교량형 자본을 형성하려면, 기존의 존재와 취향을 뛰어넘는 영화 감상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 간의 관계에서 이뤄집니다. 나를 아끼는 사람은 “니 취향인 것 같아서...”를 넘어 “니가 보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단지 내 취향을 고려해서 권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기에 어떤 영화를 추천합니다. 내 취향이 아닌 작품이라도 ‘00이 나를 위해 추천해준 영화’같은 맥락은 그 영화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또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수다 떨다, 심야에 본 영화’ 같은 스토리는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텔레비전에 귀신이 나오면 눈을 질끈 감는 사람도,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면, 강시, 뱀파이어, 좀비까지 밤을 새가며 공포장르를 마스터 할지도 모르죠. 어떤 사람이 아주 열정적으로 애정을 고백하는 영화들은 괜스레 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대체 어떤 영화 길래 저래? 같은 심리죠. 특별한 맥락과 스토리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니 큐레이션을 위해 가장 요긴한 방법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영화에 관한 대화를 한다고 해봅시다. 내가 왜 그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말로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은 글로 써서 전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왜 좋아하냐고 물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그냥”일 것입니다.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는 것이죠. 물론 정말 ‘그냥’의 영역,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그냥’을 잘 파헤쳐보면 나도 잘 몰랐던, 우리 무의식에 있는 어떤 기억, 목소리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내 영화 취향을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영화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게 됩니다.
영화 큐레이션의 목적은 나에게 흥미 있는 영화를 찾고, 나아가 나의 행복과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영화의 장르나 분위기, 줄거리, 감독, 출연 배우를 기술적으로 분석해서 내가 좋아할만한 영화를 찾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적극적인 대화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가늠하며, 영화와 나의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나의 세계를 더욱 넓고 깊은 장소로, 풍성한 터전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함께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큐레이션 과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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