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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큐레이션

우리는 영화로 무엇을 하는가?

by 별그물 2021. 8. 7.

영화는 오락일까요? 예술일까요? 영화의 발명, 그러니까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촬영하고 영사할 수 있는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장비를 발명한 이후부터 이 논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과거 많은 영화 이론가들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가령 어떤 이론가들은 영화를 창문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창문을 통해 현실 그 자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또 다른 이론가들은 영화를 일종의 언어라고 정의했습니다. 문자 언어처럼 영화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무언가를 표현하고 또 소통 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영상 언어라는 것이죠.

 

또한 어떤 이론가들은 영화를 거울 같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거울은 보이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보고 싶은 현실을 비추기도 합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설 때 실제 내 얼굴과 마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멋지고 예쁜 모습을 기대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장 멋지고 예쁜 표정을 짓 듯이요. 심지어 내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하면서 거울 속 나와 사랑에 빠질 때도 있죠. 그런 걸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죠. 영화 역시 거울처럼, 우리 자신의 현실을 담고 있지만 그곳에는 어떤 판타지와 욕망이 투영됩니다.

 

<시네마 천국>(1988)ⓒCristaldifilm.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영화를 볼 때 영화의 본질이 뭘까 고민하진 않습니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영화가 무엇이냐 보다 영화가 우리에게 무엇이냐 하는 질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창문이나 언어냐 거울이냐 하는 것보다 그 창문과 언어 그리고 거울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그것이 우리의 관심대상입니다.

 

물론 영화이론에서도 관객의 자리에 대해 질문합니다. 관객들이 어떻게 영화를 수용하고 감상하는지를 연구합니다. 하지만 영화이론의 연구 영역은 엄밀히 말하면 영화의 산업적 혹은 예술적 또는 매체적인 차원의 고찰이지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감상하고 활용하는지가 아닙니다. 영화와 영화 담론은 다른 것이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영화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이제 영화담론이라는 틀 안에 가두기에도 너무 큰 범주가 돼버렸습니다. pc,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 등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공간적 제약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의 ott 서비스는 고전 영화부터 동시개봉작까지 골라 볼 수 있는 거대한 영화 아카이브로 기능합니다. 그러니 극장에서 개봉하는 최신 영화만 봐야하는 시간적 제약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과거의 영화 췌험의 궤적이 에스컬레이터에 탄 듯 정해진 경로로만 움직여야 했다면 이제는 박물관을 자유롭게 둘러보듯 관객 저마다의 고유한 영화 체험의 연대기가 형성됩니다. 그만큼 영화와 일상의 경계는 희미해졌고 영화는 나와 우리의 삶의 일부이자 삶 그자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화라는 창문과 거울 그리고 언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 걸까요? 미국의 영화 전문 매체인 인디와이어는 오늘날 영화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 우리가 되고 싶은 것에 대한 비전, 현실을 포착하는 방법, 또 그 현실을 변화시키는 방법” (Reflections of who we are. Visions of who we want to be. A way of capturing reality. A way of changing it.)이라고 말합니다.

 

https://www.indiewire.com/gallery/best-movies-of-2010s-decade/inherent-vice-2/

 

The 100 Best Movies of the Decade

The best movies from a decade that changed everything.

www.indiewire.com

 

영화 이론가들이 고찰한 영화의 존재론을 경유해서 설명하자면, 영화는 우리의 삶에 이렇게 자리합니다.

 

우리는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성찰합니다.

그 거울은 우리가 되고 싶은 것에 대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영화라는 창문을 통해 현실을 포착합니다.

우리는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이미 이 4가지를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 는 대화를 할 때 화제에 올릴 수 있는 너무나 일상적인 소재입니다. 어색한 자리에서 긴장을 풀기위해 날씨 얘기만큼이나 가볍게 건네 볼 수 있는 게 영화얘기죠. “<기생충>보셨어요? 어떠셨어요?” 이런 질문 처럼요. 또 가족, 친구들,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소개팅에서, 모임 자리에서, 블로그에 글을 쓰며, sns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얘기 혹은 영화를 매개로 한 이야기나 대화를 하게 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의 폐단이 얼마나 큰지” 같은 얘기들 말입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더 이상 영화담론과 영화 문화는 특정 저널리즘이나 평론가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대규모 담론으로 포괄될 수 없습니다. 영화의 대중성과 상업성은 다릅니다. 현재 한국영화산업은 영화시장 안에 갇혀 상업성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산업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개인의 영화 체험은 다양해지고 있는데 그것이 담론화 되지 않다보니, 영화문화는 산업이 대중성을 제고할 수 있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뿌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한국 영화산업이 양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영화가 새롭지 않다는 지적을 받는 것은 그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영화 취향을 폭넓게 나누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 짓는 아래로부터의 담론이 튼튼하게 형성돼야만 영화 산업과 문화가 선순환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문화의 측면에서도 영화담론의 내용이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담론은 크게 영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영역, 영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영역, 영화에 대한 가치판단, 즉 비평하는 영역의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영역을 주로 다루는 것은 영화학, 영화이론입니다. 영화에 대해 가치 판단하는 비평은 주로 영화 저널리즘이나 영화 유튜버, 영화 블로거들에 의해 수행됩니다. 그리고 영화 담론에서 가장 대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은 바로 영화의 상징, 의미, 주제에 대해 해석하는 영역입니다. <인셉션>, <곡성>, <테넷>, <기생충>같은 영화들이 개봉했을 때 수많은 네티즌들의 해석 놀이가 범람했었죠.

 

영화학자들은 영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엄밀한 과정 없이 영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영화 해석 이라는 게 대부분 재미나 호기심에서 하는 것인데 각 잡고 영화 이론을 적용해가며 할 필요까지 있나요? 또 해석은 자연스레 분석을 불러일으키고 창의적인 해석은 좋은 분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해석과 분석의 선순환을 감안하면 다양한 해석 놀이는 분명 영화문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영화 해석 활동의 구체적 양상을 보면 그것이 영화를 보는 하나의 진리(이데아)가 있다는 걸 전제하고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권위 있는 영화 평론가나 매체가 영화에 대해 정답 풀이하듯 말하는 것으로 나의 영화감상을 대신하는 경우가 생기죠. 영화에 내포된 진리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감독이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도 투영되기 때문에 심지어 영화를 만든 감독 또한 영화의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관객 한명 한명은 자기만의 경험과 지식을 지닌 고유한 존재인데 그런 관객들이 영화와 만나 저마다의 별자리를 그리지 않고 한 두 편의 흥행영화에서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려 애쓰는 것은 소모적인 일입니다. “걔가 결국 착한편이 아니고 나쁜 놈이었어?” 같은 해석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죠. 물론 그것도 나름 재밌긴 합니다. 그런 활동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다변화되는 관객들의 영화적 연대기만큼이나 영화 매체가 아니라 관객이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는 영화문화가 필요합니다. 그중 하나는 영화를 매개로 비판하고 참여하며, 표현하는 영화 리터러시 활동일 것입니다. 또 영화산업과 영화문화의 접점에 있는 영화 큐레이션 활동도 있습니다. 영화 큐레이션은 단순히 영화를 선별하고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그래서 영화산업과 관객문화를 연결하는 활동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와 나의 주관적인 관계 그리고 영화를 매개로 나와 우리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활동입니다. 나 그리고 우리의 ‘기억과 목소리’로 영화를 읽고,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며, 문화적 연결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영화 큐레이션입니다.